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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스크의 풍요인가, 하라리의 소외인가? : 톨스토이가 던지는 노동과 삶의 실존적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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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스크의 풍요인가, 하라리의 소외인가? : 톨스토이가 던지는 노동과 삶의 실존적 대답 들어가며: 두 거인이 던진 도발적인 미래 시나리오 우리는 늘 '내일'을 위해 오늘을 저당 잡히며 살아갑니다. "나의 노후는 안전한가?"라는 묵직한 질문은 늘 우리 곁을 떠나지 않죠. 그런데 인류의 미래를 설계하는 두 거인이 이 오래된 믿음을 근본부터 흔드는 화두를 던졌습니다. 한 명은 기술이 가져올 전무후무한 '풍요'를 약속하고, 다른 한 명은 그 풍요의 끝에 기다리는 인간의 '소외'를 경고합니다. 이 팽팽한 평행선 사이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내일을 준비해야 할까요? 톨스토이의 고전 **'바보 이반'**의 지혜를 빌려 그 길을 찾아봅니다. 1. 일론 머스크의 UHI: 결핍의 종말과 '축적'의 무의미함 일론 머스크는 인류 역사상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결핍의 종말'을 선언합니다. 그가 말하는 **보편적 고배당(UHI)**의 시대는 더 이상 생존을 위해 아등바등 자산을 모으는 시대가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로봇이 농사를 짓고 에너지가 무한해지는 세상에서 노동은 선택이 됩니다. 머스크는 묻습니다. "기계가 모든 가치를 생산하고 시스템이 배당을 주는데, 왜 현재의 삶을 희생하며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자본을 쌓는가?" 그의 관점에서 미래의 안전은 개인의 저축이 아니라 기술 시스템의 효율성이 책임지는 영역입니다. 2. 유발 하라리의 무용 계급: 지갑의 풍요와 존재의 상실 반면 유발 하라리는 머스크가 말하지 않는 차가운 이면을 직시하라고 말합니다. 그는 경제적 풍요가 반드시 인간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주지는 않는다고 단언합니다. 우리가 노후의 무기로 삼았던 '평생의 노하우'가 AI 앞에서 무력해질 때, 우리는 경제적 빈곤보다 더 지독한 **'사회적 무용함'**과 마주하게 됩니다. 지갑은 채워졌으나 쓸모는 사라진 세상에서 ...

[시리즈 ②] 안젤리나 졸리와 데이터교: 내 의지는 정말 나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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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 시리즈 ②] 안젤리나 졸리와 데이터교: 내 의지는 정말 나의 것인가? 들어가며: 『호모 데우스』 책 소개와 연재의 의도 유발 하라리의 저작 **『호모 데우스』**는 『사피엔스』가 인류의 과거를 다뤘다면, 인류가 기술을 통해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미래를 다룬 문제작입니다. 이 책은 단순히 기술 발전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으로서 당연하게 믿어왔던 가치들이 기술 앞에서 어떻게 해체되는지를 냉정하게 해부합니다. 지난 1부에서 인류가 불멸과 행복을 꿈꾸며 스스로 '신'이 되기로 결심했다면, 오늘 2부에서는 그 신이 되려는 여정에서 우리가 기꺼이 내놓은 제물, **'자유의지'**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우리가 내리는 결정이 과연 정말 '나의 것'인지, 아니면 정교한 '알고리즘의 계산'인지 그 실체를 파헤쳐 보는 것이 이번 글의 목적입니다. 1. 직관보다 데이터를 믿다: 권위의 대이동 인본주의 시대의 핵심 표어는 "네 마음이 가는 대로 하라"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인류는 내면의 목소리보다 외부의 수치를 더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1) 안젤리나 졸리의 선택: 생물학적 예언 2013년, 할리우드 스타 안젤리나 졸리는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결정을 내립니다. 멀쩡한 유방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은 것이죠. 그녀는 당시 아프지 않았고 종양도 없었습니다. 다만 유전자 검사 결과 'BRCA1'이라는 유전자 변이가 발견되었고,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87%**라는 데이터 를 받았을 뿐입니다. 과거의 인본주의라면 "내 몸의 느낌"과 "자신의 직관"을 믿으라고 했겠지만, 졸리는 자신의 느낌 대신 알고리즘의 수치 를 선택했습니다. 하라리는 이 사건이 인류 역사의 거대한 변곡점이라고 말합니다. 권위가 인간의 '내면'에서 외부의 '데이터'로 옮겨간 상징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내 몸의 주인은 나...

[시리즈 ③] 쓸모없는 인간계급의 탄생: 사피엔스의 최후인가, 새로운 시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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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 시리즈 ③] 무용(Useless) 계급의 탄생: 사피엔스의 최후인가, 새로운 시작인가? 들어가며: 『호모 데우스』 책 소개와 연재의 의도 유발 하라리의 저작 『호모 데우스』 연재, 그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시간입니다. 1부에서 우리는 인류가 불멸과 행복을 꿈꾸며 신이 되려 한다는 야망을 보았고, 2부에서 그 과정 중 우리의 '자유의지'가 데이터와 알고리즘에 어떻게 잠식당하는지 살폈습니다. 이제 마지막 질문이 남았습니다. "알고리즘이 인간보다 모든 일을 더 잘하게 될 때, 평범한 인간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라리는 이 질문에 대해 인류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단어인 **'무용(Useless) 계급'**을 꺼내 듭니다. 오늘은 사피엔스라는 종이 마주할 마지막 생존 전략과, 우리가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사수해야 할 실존적 가치들을 파헤쳐 봅니다. 1. 지능과 의식의 분리: 인간의 독점권이 해체되다 과거 수천 년 동안 '지능'과 '의식'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었습니다. 높은 지능을 발휘하려면 반드시 감정과 주관적 경험(의식)을 가진 '인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공지능(AI)은 이 공식을 완전히 파괴했습니다. 의식 없는 지능의 승리: 구글의 알파고는 바둑을 두며 기쁨을 느끼지 않고, 자율주행 알고리즘은 운전하며 풍경에 감동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지능'은 인간을 압도합니다. 시스템의 냉혹한 선택: 자본주의와 국가 시스템은 의사가 환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의식'보다, 암 세포를 0.1%의 오차 없이 찾아내는 '지능'을 원합니다. 시스템이 인간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며 지치지 않는 알고리즘을 선택하는 순간, 인간의 자리는 사라집니다. 2. 무용(Useless) 계급의 출현: 착취보다 무서운 '무관심' 하라리는 21세기의 가장 큰 위협은 과거처럼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시리즈 ①]인간이 신이 되려는 시대, '호모 데우스'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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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 시리즈 ① ]인간이 신이 되려는 시대, '호모 데우스'의 탄생 들어가며: 왜 지금 유발 하라리를 읽어야 하는가? 인공지능(AI)이 글을 쓰고, 유전공학이 질병을 설계하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기술의 편리함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의 자리는 어디인가?"라는 막연한 불안감을 느낍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저서 **『호모 데우스(Homo Deus)』**를 통해 인류의 과거가 아닌 '충격적인 미래'를 예고합니다. 제가 이 책을 3부작 시리즈 로 연재하는 이유는 단순한 책 요약이 목적이 아닙니다. 기술이 신의 영역에 도달했을 때,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주도권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 를 여러분과 함께 깊이 고민해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 시리즈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신이 되었을 때, 과연 우리는 여전히 '인간'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1. 인류의 오래된 숙적: 기아, 역병, 전쟁의 퇴장과 비만, 노화, 자살의 등장 하라리는 인류 역사의 99%를 지배했던 세 가지 거대한 재앙이 21세기 들어 '통제 가능한 변수'가 되었다는 파격적인 선언으로 글을 시작합니다. 기아(Famine)보다 비만: 과거에는 가뭄 한 번에 수만 명이 굶어 죽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과잉 생산'의 시대에 삽니다. 하라리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굶어 죽는 사람보다 설탕을 너무 많이 먹어 비만으로 죽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기아는 이제 자연재해가 아니라 정치적 실패의 결과일 뿐입니다. 역병(Plague)보다 노화: 흑사병이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몰살했던 시절은 지났습니다. 현대 사피엔스는 외부의 바이러스보다 내 몸의 내부 결함, 즉 **'노화'와 '암'**을 정복하는 데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전쟁(War)보다 자살: 과거 전쟁은 국가의 영토를 ...

길 위에서 마주한 주님의 얼굴: 톨스토이 '두 노인'이 건네는 영혼의 갈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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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위에서 마주한 주님의 얼굴: 톨스토이 '두 노인'이 건네는 영혼의 갈림길 안녕하세요. 오늘은 러시아의 거장 톨스토이가 우리에게 남긴 신앙의 이정표, **<두 노인>**을 통해 우리 삶의 진정한 성지가 어디인지, 그리고 우리가 기다리는 응답의 실체는 무엇인지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1. 두 갈래의 순례: 걷는 자와 머무는 자, 누가 먼저 주님을 만났을까? 평생의 숙원이었던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위해 길을 떠난 두 친구, 에핌 과 엘리샤 가 있습니다. 이들은 각각 우리 신앙의 두 가지 얼굴을 상징합니다. 부유하고 엄격한 에핌에게 순례는 '반드시 완수해야 할 신성한 의무'였습니다. 그는 한 치의 오차 없이 목적지를 향해 전진하며, 자신의 경건이 훼손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합니다. 반면 가난하지만 낙천적인 엘리샤에게 순례는 '주님을 향한 설레는 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기근으로 죽어가는 이들을 목격했을 때 두 사람의 길은 운명처럼 나뉩니다. 에핌은 그들을 뒤로한 채 '성지'라는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고, 엘리샤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평생 염원이었던 예루살렘을 포기한 채 그들의 비참한 오두막에 머물기로 결심합니다. 2. '주님을 믿는다'는 것의 실체: 관념에서 삶으로 에핌은 마침내 예루살렘 성묘 교회에 도착해 예배를 드립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기이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분명 뒤처졌던, 아니 길을 되돌아갔던 친구 엘리샤가 제단 가장 앞에서 환한 빛에 싸여 기도하고 있는 환상을 본 것입니다. 여기서 톨스토이는 신앙의 본질에 대해 준엄한 가르침을 던집니다. 신앙이란 보이지 않는 주님을 보기 위해 물리적인 먼 곳으로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이웃의 고통 속에서 주님의 얼굴을 발견하고 그 곁에 머무는 용기 라는 것입니다. 에핌은 몸은 성지에 있었으나 마음은 여전히 '나의 경건'과 '나의 구원'이라는 감옥에 갇혀 ...

노후 준비 필요없다는 말과 노동의 필요성은 별개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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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 지혜] 바보 이반과 일론 머스크의 한판 승부: '숫자의 지옥'에서 탈출하는 법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가에서 비명이 터져 나옵니다. 첨단 AI 진단 시스템도 살려내지 못한 외동딸을 살려낸 것은 다름 아닌 시골의 '바보' 이반이 건낸 흙 묻은 알약 하나였습니다. 하루아침에 재벌가 사위이자 거대 기업의 총수가 된 이반, 하지만 그의 행보는 기괴합니다. 화려한 턱시도 대신 늘 입던 투박한 작업복을 고수하고, 사장실에 흙을 깔아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이죠. 최근 제 유튜브 채널에서 다룬 **<바보 이반>**의 현대적 각색은 이 도발적인 설정에서 시작됩니다. 이 '바보 같은' 이야기 속에 일론 머스크가 예언하는 '초현실적 미래'가 숨어 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1. 톨스토이가 설계한 '바보 이반'의 역설: "손의 굳은살이 당신의 신분증이다" 톨스토이의 원작을 현대적으로 비틀어보니, 이반이 맞서 싸우는 악마는 다름 아닌 **'알고리즘과 숫자의 유혹'**이었습니다. 악마들은 이반의 형들을 권력과 자본의 독으로 몰락시킨 뒤, 이제 이반의 기업을 찬탈하려 합니다. 숫자의 악마 vs 땀의 이반: 화려한 투자자로 변신한 대장 악마는 버튼 하나로 전 세계의 부를 지배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머리를 써라! 숫자를 지배하라!"는 악마의 선동에 사람들은 삽을 버리고 전광판 모니터에 매달립니다. 관계로서의 노동: 하지만 이반은 전 직원에게 선포합니다. "우리 회사에선 손에 굳은살이 박이지 않은 자는 식탁에 앉을 수 없다!" 톨스토이에게 노동은 단순히 물건을 만드는 '생산'이 아닙니다. 내가 직접 수고함으로써 타인과 수평적인 관계를 맺고, 그 진심을 나누는 **연대의 기술(Relationship as Labor)**입니다. 붕괴하는 시스템과 빵 한 조각: 결국 악마가 외부 공급망을 끊어버리자 형들이 자랑하던...

꽉 막힌 인간관계를 풀어주는 톨스토이의 한 줄 지혜: 돌멩이 수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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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꽉 막힌 인간관계를 풀어주는 톨스토이의 한 줄 지혜: 돌멩이 수프 이야기 ​"진심으로 다가가도 마음의 문을 닫아거는 사람들 때문에 상처받은 적 있으신가요?" 아무리 노력해도 변하지 않는 주변 사람들, 혹은 삭막해진 세상 인심에 지친 분들이라면 오늘 이 이야기가 해답이 될지도 모릅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전하는 마법 같은 우화, '돌멩이 수프' 이야기입니다. ​ [본문 1: 기발한 시작, 돌멩이로 수프를?] ​ 짙은 안개가 자욱한 어느 날, 배고픈 나그네가 한 마을에 들어섭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낯선 이를 경계하며 문을 굳게 닫아버리죠. ​이때 나그네는 화를 내거나 구걸하는 대신, 아주 기발한 행동을 합니다. 마을 광장에서 평범한 돌멩이 하나 를 줍더니 냄비에 물을 붓고 끓이기 시작한 것이죠. ​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돌멩이 수프'를 끓여야겠군!" ​비웃으며 지켜보던 사람들은 나그네의 이 황당하고도 자신만만한 중얼거림에 호기심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 [본문 2: 닫힌 마음을 여는 '한 끗' 차이] ​ 나그네는 냄비를 저으며 혼잣말을 이어갑니다. "아, 여기에 양파 하나만 있으면 정말 완벽할 텐데... 감자가 조금만 들어가면 임금님 식탁도 안 부러울 거야."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창문을 꼭 닫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양파를, 감자를, 당근을 들고 나오기 시작한 겁니다. 나그네는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더 좋아질 수 있다'는 가능성 을 보여주었을 뿐인데, 사람들은 스스로 마음의 빗장을 풀고 나눔에 동참했습니다. ​ [본문 3: 진짜 마법은 돌멩이가 아니었다] ​ 차가웠던 밤하늘 아래, 마을 사람들은 갓 끓여낸 따뜻한 수프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웁니다. 사람들은 깨달았습니다. 맛의 비결은 신비로운 돌멩이가 아니라, 나그네의 지혜가 깨워준 **'서로를 향한 열린 마음'**이었...

심화 | AI 시대, 인간의 노동이 사라진다?! : 자존감을 증명하는 ‘자발적 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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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화] AI 시대, 인간만이 가지는 노동의 미학: 존재를 증명하는 ‘자발적 수고’ 일론 머스크가 예고한 **보편적 고소득(Universal High Income, UHI)**의 시대는 인류에게 '생존을 위한 노동'의 종말을 선언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결핍 없이 주어지는 세상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기계가 나보다 완벽한 결과물을 공짜로 내놓는 세상에서, 나의 노동은 과연 어떤 가치를 갖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19세기 톨스토이가 예찬했던 바보 이반 의 투박한 손바닥 안에 있습니다. 시스템이 대체할 수 없는, 오직 인간의 호흡만이 빚어낼 수 있는 '노동의 미학'을 통해 다가올 미래의 존재 양식을 고찰해 봅니다. 1. 인내의 미학: ‘과정의 고통’이 빚어내는 희소성 (The Value of Effort) AI의 결과물은 순식간에 만들어지며 고통이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노동에는 '인내'와 '시간'이 들어갑니다. 톨스토이의 관점: 이반이 땀 흘려 지은 농작물이 귀한 이유는 그것이 생명의 순리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가치: 결과물이 똑같더라도, 사람이 직접 깎고 다듬은 목공예품이나 손으로 쓴 편지가 더 비싸게 거래되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얼마나 효율적인가'**가 아니라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가'**가 새로운 경제적·정서적 기준이 됩니다. '과정의 고통'을 기꺼이 감수한 결과물은 그 자체로 대체 불가능한 희소성을 획득합니다. 2. 공감의 경제: ‘관계와 돌봄’의 영적 연결성 (The Value of Connection) AI는 완벽한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거나 진심으로 기뻐할 수는 없습니다. 톨스토이의 관점: 바보 이반의 나라에는 군대도, 돈도 없지만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적 사랑'이 있습니다. 미래의 가치: 간병, 육아, 상담, 그리고 이웃과의 소통처럼 **'...

가상대담 | 보편적 고소득과 보편적 기본소득에도 인간의 노동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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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상 대담] 바보 이반과 천재 머스크의 대화: "무한 풍요의 시대, 인간은 왜 땀을 흘려야 하는가?" 21세기, 인류를 화성으로 보내려는 '천재' 일론 머스크 와 19세기 러시아 민담 속에서 묵묵히 땅을 갈던 '바보' 이반 이 만났습니다. 한 명은 기술의 끝에서 '결핍의 종말'을 설계하고, 한 명은 노동의 끝에서 '존재의 본질'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이 극단적인 두 세계관의 충돌을 통해 우리의 미래를 엿보려 합니다. 1막. 보편적 기본소득(UBI)을 넘어 보편적 고소득(UHI)으로 🚀 머스크 : 이반 씨, 당신의 우직함은 존경스럽지만 이제 당신처럼 힘들게 삽질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제가 만드는 AI와 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가 당신보다 수만 배는 더 빠르고 정확하게 농사를 지어줄 겁니다. 인간은 이제 생존을 위한 '노동의 노예'에서 완전히 해방될 거예요. 👨‍🌾 이반 : (웃으며 땀을 닦고) 일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그럼 우리 마을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삽니까? 배가 고프면 마음도 사나워지는 법인데 말이죠. 🚀 머스크 : 그래서 저는 **보편적 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 UBI)**이라는 안전망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 최종 목표는 그보다 더 나아간 **보편적 고소득(Universal High Income, UHI)**의 시대입니다. 기계가 생산하는 부가 너무나 막대해서, 모든 물건의 가격이 거의 '0'에 수렴하게 될 겁니다. 돈 걱정은커녕 누구나 원하는 만큼의 풍요를 누리는 세상, 상상이 가시나요? 2막. 빵은 넘쳐나는데 왜 '무위(無爲)의 고통'이 찾아오는가 👨‍🌾 이반 : 누구나 부자가 되는 세상이라... 참 신기한 나라군요. 하지만 머스크 씨, 당신의 눈빛에는 걱정이 서려 있네요. 무엇이 두려우신 겁니까? 🚀 머스크 : 정확하시군요. 제 걱정은 '결핍의...

찰리 채플린의 방황을 멈춘 사랑: 애착 결핍과 부부 갈등을 다시 바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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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지혜]찰리 채플린의 방황을 멈춘 사랑: 애착 결핍과 부부 갈등을 다시 바라보다 ​ "사랑은 상대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먼저 나 자신을 정화하는 일입니다."   1. 우연히 마주한 천재의 뒷모습  오늘 아침, 커피 한 잔을 곁들이며 우연히 영상 하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특별한 목적 없이 알고리즘이 이끄는 대로 시청하게 된 그 영상은 세계적인 희극 배우, 찰리 채플린의 삶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스크린 속에서 커다란 바지와 지팡이로 전 세계를 웃겼던 '떠돌이(The Tramp)' 채플린. 하지만 그 화려한 조명 뒤에 가려진 실제 삶은 지독한 방황의 연속이었습니다. 2,000명이 넘는 여성과의 염문, 세 번의 이혼과 네 번의 결혼. 처음에는 그저 시대를 풍미한 천재 예술가의 파란만장한 여성 편력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영상이 중반을 넘어설 때쯤, 저는 그 안에서 묘한 슬픔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어느새 남의 인생사가 아닌, 제 삶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2. 방황의 뿌리: 채워지지 않는 '텅 빈 마음' ​채플린의 방황을 단순한 도덕적 잣대로만 비난할 수 없는 이유는 그의 유년 시절에 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그는 **'불안정 애착'**의 전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부재하는 아버지와 무너진 가정: 알코올 중독으로 일찌감치 집을 나가 연락두절이 된 아버지   평생 엄마에 대한 그리움에 젖었던 텅빈 마음 :  정신적 질환으로 정신병원을 오가며 고통받던 어머니 생존을 위한 유년기: 빈민가를 전전하며 구걸과 노동으로 버텨야 했던 아이에게 '정서적 안전기지'란 사치였습니다. 어린 시절 보호자로부터 안정적인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는 성인이 되어 두 가지 양상을 보입니다. 사랑을 끊임없이 갈구하며 매달리거나(불안형), 관계가 깊어지면 구속받는 느낌에 도망쳐 버리는(회피형) 것이죠. 채플린에게 수많은 여성은 쾌락의 대상이 아니라, 어린 시절 받...

30년 경력의 영화 마케터가 본 '두쫀쿠' 열풍: 일본 아들까지 줄 세운 두바이 초콜릿 쿠키의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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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케팅 인사이트] 30년 경력의 영화 마케터가 본 '두쫀쿠' 열풍: 일본 아들까지 줄 세운 두바이 초콜릿 쿠키의 마법 며칠 전, 일본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작은 아들과 통화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아들이 요즘 "두쫀쿠 파는 가게를 알아보고 있다"며, "꼭 한번 먹고 싶다"는 말을 하더군요. 처음 듣는 '두쫀쿠'라는 생경한 단어에 마케터로서의 직감이 발동했습니다. 대체 무엇이기에 일본에 있는 아들이 이토록 열광하는지 찾아본 결과, 이것이 한국에서 시작된 강력한 K-컬처 트렌드이자 현재 일본 열도를 뒤흔들고 나아가 두바이 본토까지 역수출되는  새로운 현상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원래 30년 넘게 영화 마케팅을 했던 영화 마케터였습니다. 대학원에서 광고홍보학을, 박사 과정에서 문화콘텐츠학을 공부하며 뼛속까지 마케터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비록 논문 제출 후 유방암 판정으로 학위의 마지막 매듭을 짓지는 못했지만, 세상을 읽는 마케터의 시선만큼은 여전히 살아있다 생각합니다. 한국에 있는 저보다 일본 직장에 있는 아들이 먼저 노래를 부르는 이 열풍. 직접 먹어보기도 전에 국경을 넘어 들려온 이 현상의 이면에는 현대 마케팅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구전 마케팅(Word-of-Mouth)**이 절묘하게 녹아있다는 생각에서 오래 묵혀놓은 전문가적 시각을 발동시켜 보았습니다.  1. 비주얼 텍스처와 '글로벌 알고리즘'의 승리 과거의 쿠키가 맛 중심이었다면, 두쫀쿠는 **시각적 물성(Materiality)**을 강조합니다. 본래 '두껍고 쫀득한 쿠키'의 줄임말인 두쫀쿠는 르뱅 스타일의 두툼함과 떡 같은 식감을 지녔습니다. 한국에서 시작된 이 열풍은 이 '압도적 비주얼'의 SNS 짧은 영상(Short-form)으로 언어의 장벽 없이 알고리즘을 타고 일본 젊은 세대의 눈을 즉각 사로잡았습니다. 2. '쿠케팅'이 만든 자발적 갈증과 희소성 아들이 가게를 따...

바보들이 세상을 구원한다 : 톨스토이 '바보 이반'의 현대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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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지혜] 바보들이 세상을 구원한다 : 바보 이반과 바보 김수환 추기경 요즘 세상에서 “바보처럼 살라”는 말만큼 위험한 조언도 없습니다. 똑똑해야 살아남고, 치밀하게 계산해야 손해 보지 않으며, 남보다 앞서야 성공한다고 배우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든 사람들을 떠올려 보면, 그들 대부분은 당대에 '바보' 취급을 받았거나 스스로 바보처럼 살았던 이들이었습니다. 1. 바보 이반 ― 계산하지 않는 마음 러시아 민담 속 바보 이반 은 늘 손해를 보는 인물입니다. 그의 형들은 똑똑해서 이익을 챙기고, 권력을 잡고, 부자가 됩니다. 반면 이반은 말귀도 어둡고, 욕심도 없으며, 그저 묵묵히 시키는 일만 합니다. 주변 사람들은 비웃으며 말합니다. “쟤는 정말 바보다.” 하지만 이야기는 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갑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은 이반에게 예상치 못한 길들이 열리고, 사람을 속이지 않은 이반에게는 진심 어린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끝내 그가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똑똑해서가 아니라, 어떤 순간에도 '사람'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 바보 김수환 ― 스스로 바보가 되기를 선택한 성자 고(故) 김수환 추기경님 은 스스로를 이렇게 불렀습니다. “나는 바보로 살고 싶다.” 그분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지만, 결코 권력을 휘두르지 않았습니다. 특권을 누리는 대신 늘 가장 낮은 곳, 약자의 편에 섰습니다. 군사정권 시절, 모두가 두려움에 침묵할 때 그분은 진실을 말했고, 다수가 외면할 때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성당의 문을 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보고 말했습니다. “왜 저렇게까지 위험을 무릅쓰지? 괜히 나서서 손해 보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바보 같은 손해’ 덕분에, 절망에 빠졌던 수많은 사람이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었습니다. 3. 바보의나눔 ― 남기지 않고 떠난 자의 따뜻한 유산 김수환 추기경님이 세상을 떠나신 뒤 만들어진 ‘바보의나눔’ 재단 은 그분의 삶...

사복경찰의 악몽: 명의도용의 공포 속에서 나를 지킨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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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의 지혜] 사복경찰의 악몽: 명의도용의 공포 속에서 나를 지킨 기록 두 달 전 그날을 잊지 못합니다. 아버지가 대장암이라는 소식, 그리고 당장 수술을 받으셔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듣고 성당을 찾았습니다. 눈물로 간절히 기도를 드리고 나오던 길, 제 얼굴은 이미 온통 눈물 범벅이었고 정신은 아득했습니다. 온 신경이 아버지에게 가 있던 터라 평소 잘 알던 길조차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성당 앞 횡단보도 전에 있는 유턴 구간인데 보행신호에서 횡단보도를 조금 끼고 직진하다가 급하게 좌회전을 해버렸습니다. 평소라면 돌아서 갈 길이었지만, 그날은 그렇게 해서라도 빨리 집에 가고픈 마음이었습니다. 신호위반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력은 이미 사라졌고 제 마음은 이미 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때, 악몽 같은 경적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1. 츄리닝 차림의 남자, 그리고 건네버린 면허증 설마 나한테 경적을 울리는 거라 생각 못하고 그냥 차를 몰고 가려는데 뒤따라오던 검은색 그랜저 한 대가 계속 요란하게 경적을 울리며 저를 멈춰 세웠습니다. 차창 밖으로 신분증 같은 것을 흔들며 갓길 정차를 요구하는 남자. 츄리닝 차림이 의아했지만, 죄지은 사람처럼 당황한 저는 그저 '사복 경찰이겠거니' 하며 차를 세웠습니다. 그는 제가 중앙선 침범을 했다며 면허증을 요구했습니다. 저는 심장이 떨려 급히 가방에서 면허증을 꺼내 건넸습니다. 그는 제 면허증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보더니, 갑자기 허공을 응시했습니다. 1초가 1분 같던 기묘한 정적... 잠시 후 그는 "이번만 봐줄 테니 그냥 가라"며 면허증을 돌려주었습니다. 저는 그저 봐준다는 말에 바보처럼 "고맙습니다"라고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를 건넸습니다. 2. 집으로 가던 100미터, 뒤늦게 엄습한 실체 없는 공포 한시름 마음이 놓여 내가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차를 몰고 집으로 향하던 짧은 길. 불과 100미터쯤 갔을까요? 문득 아까 그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

고지혈증 약, 무조건 믿지 마세요: 횡문근융해증 초기 신호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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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의 지혜] 고지혈증 약, 무조건 믿지 마세요: 횡문근융해증 초기 신호 극복기 "기존 '레바논의 숲'이 조금 더 삶의 활기를 담은 **'레바논의 숲 라이프'**로 새롭게 단장했습니다. 마음의 평온뿐만 아니라, 우리 몸의 지혜를 찾아가는 여정도 함께 나누려 합니다." 그동안 ‘레바논의 숲’에서 톨스토이의 문장을 통해 정신의 평온을 찾아왔지만, 사실 제 몸은 지난 두 달간 거센 풍랑을 겪고 있었습니다. 2년 넘게 하루도 빠짐없이 복용해온 고지혈증 약(스타틴 계열 '페바라')이 일으킨 예상치 못한 부작용과 그 위험했던 순간의 기록을 공유하려 합니다. 약의 효능 뒤에 가려진 위험 신호를 제 실제 경험을 통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단순 몸살이나 자세 문제인 줄 알았던 통증의 방황 두 달 전, 온몸이 부서질 듯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등이 너무 당기고 아파서 혹시 '췌장에 이상이 있나' 싶은 공포에 내과 진료를 받았고, '뼈에 문제가 있나' 싶어 정형외과도 찾았습니다. 정형외과에서는 자세 문제라며 통증 주사와 물리치료를 권했지만, 왠지 모를 거부감에 주사는 맞지 않고 한의원에서 침 치료를 받으며 버텼습니다. 하지만 증상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오전 내내 무기력하게 누워 있어야만 할 정도로 고통은 깊어졌습니다. 2. 갈색 소변, 몸이 보낸 마지막 위급 경고 그러다 어느 날, 위급함을 알리는 **'갈색 소변'**을 보게 되었습니다. 직감적으로 상황이 심각함을 느끼고 다시 병원을 찾았습니다. 제 몸은 이미 근육 세포가 파괴되어 혈액으로 흘러나오는 '횡문근융해증'의 문턱에 서 있었습니다. 2년간 내 몸을 지켜줄 것이라 믿고 먹었던 스타틴 계열의 약이 오히려 제 몸의 근육을 공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3. 병원 진단과 천만다행이었던 혈액검사 결과 병원에서 긴급히 혈액검사를 진행했습니다. 다행히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CK(근육 ...

톨스토이가 남긴 가장 조용한 위로: 내가 만난 성모꽃마을의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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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세이] 톨스토이가 남긴 가장 조용한 위로: 내가 만난 성모꽃마을의 '예수님' ​살다 보면 도저히 마음이 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딱히 나에게 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그저 그 사람의 겉모습이나 행동 하나하나가 불편하고 싫어서 마음속으로 밀어내게 되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저에게는 항암후유증으로 온 영혼과 마음과 몸이 지쳐있을 때 갔던 성모꽃마을에서 만난 한 아저씨가 그랬습니다. ​내 마음이 닫혀버린 '그 사람' ​그 아저씨는 늘 허름한 차림에 이빨은 먹다 남은 옥수수처럼 여기저기 빠져 있었고, 몸은 가냘프고 어딘가 아픈 환자 같아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꽃마을 구석구석을 청소하며 지나가는 사람마다 말을 걸고 간섭하곤 하셨죠. 솔직히 말하면, 저는 그 아저씨가 너무나 싫었습니다. 그분이 가까이 오면 외면했고, 자꾸 말을 시키는 것이 귀찮아 마음속으로 깊이 밀어냈습니다. 제 마음은 차갑게 닫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의 얼굴에서 그를 보았습니다 ​마음이 너무 힘들어 꽃마을 한가운데 서 있는 예수님 상을 찾아갔던 날이었습니다. "예수님,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제가 너무 힘듭니다."라고 간절히 매달리며 예수님의 얼굴을 응시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인자하게만 보이던 예수님의 얼굴이 갑자기 제가 그토록 외면하고 싫어했던 그 아저씨의 얼굴로 겹쳐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흐르며 깜짝 놀랐습니다. ​ '아, 주님이 저 아저씨의 모습으로 내 곁에 계셨구나.' ​그날 이후, 저는 그 아저씨를 더 이상 '싫은 사람'으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저의 예수님이셨고, 주님이 보내신 가장 낮은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미워하던 마음이 사라지자 저는 비로소 아저씨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친절하게 대할 수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상대를 향한 마음을 바꾸자, 제 영혼을 짓누르던 괴로움도 함께 녹아내렸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